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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영원한 빨간 마후라의 사나이 신영균 장로-한국영화재단 발전을 위해 500億 원 통 큰 기부

보도국 | 기사입력 2022/06/02 [14:18]

이슈/ 영원한 빨간 마후라의 사나이 신영균 장로-한국영화재단 발전을 위해 500億 원 통 큰 기부

보도국 | 입력 : 2022/06/02 [14:18]

이슈/ 영원한 빨간 마후라의 사나이 신영균 장로-한국영화재단 발전을 위해 500億 원  통 큰 기부 

 

▶또한 100億원 상당의 사유재산까지 서울대 발전기금으로 쾌척!-노블레스 오블 리즈 모범 실천 

▶ 나 죽으면~ "내관에 내 성경책 넣어 달라" 유언-평소 고린도전서15:10절 즐겨 암송 

  © 보국 자료

☞“영원한 빨간 마후라”의 사나이 신 영균 장로의 통 큰 기부행위가, 지난 해 2019년 세밑, 한해 마지막에 우리나라  한국교회와 사회에 큰 파도를 이루었다.

 

신 영균 원로배우는 기독교 신앙인으로 살면서 치과의사로 영화배우로 감독으로 참으로 바쁜 삶을 살면서, 수십 년 동안 작고 큰 수많은 화재와 발자취를 남겼다.

 

특히 작년 12월엔 우리나라 주요 언론사들이 신 영균의 아름다운 삶의 발자취에 대해 서로 앞을 다퉈 보도가 됐다. 

여기에 우리 뉴욕시티앤 방송도 이미 보도가 된 기사이지만, 다시 한 번 당시의 언론사 보도를 중심으로 재조명, 그 분의 삶을 본받기 위해 작성 보도한다.

     

■ 100세 시대 名士의 건강법 - 신영균 영화인 원로회 명예회장

“이제 내가 나이 아흔을 넘었으니 살아봐야 얼마나 더 살겠습니까.? 허! 허! 허! 

그저 남은 거 다 베풀고 가면서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싶어요. 

나중에 내 관 속에는 성경책 하나 함께 묻어 주면 됩니다.”

 

원로배우 신영균(94·사진)씨가 인생 말미에 띄우는 편지다. 

1960~70년대 한국 영화계를 이끈 그는 최근 모 언론사 기자와 만나 “앞으로 남은 재산을 사회에 환원 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아직 구체적 계획까지 세우진 않았지만 “영화계 지원과 후배 육성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겠다. 고 말했다. 연예계 최고의 자산가로 이름난 신씨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으로 꼽힌다. 

 

2010년 명보극장(명보아트홀)과 제주 신영균 영화박물관 등 500억 원 규모의 사유재산을 한국 영화 발전에 써달라며 쾌척해 화제가 됐다. 모교인 서울대에도 시가 100억 원 상당의 대지를 발전기금으로 기부했다. 

배우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60~70년대에 많게는 1년에 30편씩 영화를 찍어 가며 모아 온 사력을 다한 말 그대로 생명보다 귀한 재산이다.

 

■ 지난 18일 서울 명동 퍼시픽호텔에서 가진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신 영균 회장은 “긍정적인 사고와 감사하는 태도가 진정한 불로초”라고 강조했다.

▶6시 기상 10시 취침 규칙적 생활

▶아내가 끓여주는 콩국 매일 마셔

▶가끔 필드 나가는 골프도 수준급

▶재산 사회 환원 등 베푸는 삶 실천

 

한국 영화 100년의 ‘살아 있는 전설’ 신 영균 한국영화인원로회 명예회장(한주홀딩스코리아 명예회장)은 올해 우리 나이로 94세다. 여전히 건강하게 왕성한 활동을 한다. 

 

빠듯한 스케줄 탓에 인터뷰 일정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지난 18일 서울 명동 퍼시픽호텔에서 열린 영화인 원로회 총회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고 예고 없이 찾아갔다. 

 

그리고 행사를 마치고 나오는 그를 호텔 내 커피숍에서 어렵게 만났다. 그는 “노욕이라고 비판할진 모르겠지만 100세 전에 스펜서 트레이스 주연의 ‘노인과 바다’ 같은 멋진 영화 한 편 꼭 남기고 싶다”며 여전히 배우로서 의욕을 내비쳤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건강해 보였다. 

 

먼저 비결을 물었다. “특별한 건 없어요. 그래도 굳이 하나 들라면, 철저한 규칙적 생활이죠. 

일상은 매일 비슷합니다. 단조롭지만 시곗바늘 같은 생활이지요.” 그의 일과는 보통 오전 6시에 일어나 8시 30분에 아침 식사를 하고 10시에 명동 사무실로 출근한다. 

 

“출근 전 아내가 끓여준 콩국을 잊지 않고 마십니다. 

점심은 조미료를 최소화한 메뉴로 소식하지요. 

오후 3시쯤 헬스클럽에서 가벼운 근력운동과 러닝머신을 

두어 시간 하고 귀가해 6시 30분 저녁 식사 후 보통 10시에 잠자리에 듭니다.” 헬스장은 한창 바쁘던 배우 시절에도 꾸준히 다녔지만, 80대 이후에는 거의 매일 가고 있다. 오후에 행사가 있어 헬스클럽을 가지 못하면 집에서라도 반드시 실내 자전거 등으로 운동을 한다. “지금껏 건강한 것도 아내의 덕이 가장 크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신 회장은 노년에 가장 알맞은 건강 관리법은 역시 걷기라고 했다. 시간과 장소, 경비에 구애받지 않아 누구나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루 평균 6000보 정도를 걷는다. 고 한다. 걷기와 관련해 솔깃한 얘기를 들려줬다. 

일본에서 조사한 65세 이상 노인들의 걸음 수와 질병의 상관관계를 10년 동안 분석한 결과다.

 

“매일 4000보를 걸은 사람은 우울증이 없어지고, 5000보를 걸은 사람은 치매나 심장질환이 예방되고, 7000보를 걸은 사람은 골다공증과 암이 예방됐다고 해요. 또 8000보를 걸으면 고혈압과 당뇨를, 1만 보를 걸으면 각종 대상증후군을 막을 수 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많이 걷는 것이 좋습니다.”

 

이어 “걷는 것은 만병의 근원이 되는 스트레스 해소에도 최고”라면서 “많이 걷는 것 이상의 보약도 없는 것 같다. 나에게 마음의 양식이 신앙이라면 몸의 양식은 걷기”라고 강조했다.

 

그가 건강관리에 신경을 쓰기 시작한 것은 30대에 당뇨를 얻으면서다. 

“잘 시간도 없이 촬영을 강행하다 보니 대기 시간에 초콜릿을 많이 먹었는데, 그것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짧은 시간 안에 피로를 풀고 부족한 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해서였다. 

“학창시절 레슬링 대회에서 웰터급으로 2년 연속 우승할 만큼 어릴 때부터 운동을 좋아해서 건강만큼은 자신했기에 충격이 컸어요.” 술은 전혀 하지 않고 담배도 평생 멀리했지만, 경고등이 한 번 켜지고 나서는 더욱 신경 써서 몸을 아끼게 됐다고 했다.

 

걷기와 헬스클럽에서 근육운동을 하는 것 외에는 주로 골프를 한다. 

가끔 필드에 나가는 것도 건강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몇 해 전까지도 보기 플레이로 80대 후반을 치는 수준급이다.

 

그는 뒤에서 남의 험담을 하지 않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15∼16대 국회의원 8년을 지냈지만, 지금까지 그를 비판하는 사람은 들어보지 못했을 정도로 평판이 좋다. 

남 험담을 하지 않기 때문에 누구하고 다툰 적도 없다. 

 

최근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와의 인터뷰(문화일보 5월 12일 28면 참조)에서 김 교수의 말이 생각났다. ‘주변에 100세 이상 사는 사람 7명의 공통점 두 가지는 무리하지 않고, 남 험담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끝으로 정기적인 운동도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이라고 했다. 

“긍정적인 사고와 감사하는 태도가 진정한 불로초가 아닐까 싶어요. 남을 도울 수 있다는 것도 큰 행복이지요.”

 

☞평생 모은 재산을 남을 위해 선뜻 내놓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신 회장은 2010년 영화 및 예술계 인재 육성을 위해 당시 500억 원 상당의 명보극장(현 명보아트홀)과 제주신영영화박물관을 문화예술계의 공유재산으로 기증했다. 

기증 당시 기자회견에서 “국내에 인재가 많은데 적극적으로 뒷받침해 준다면 후배 영화인들이 세계를 지배할 것으로 확신 한다”고 했다. 그의 말은 현실로 이뤄졌다.

 

재단법인 ‘통일과 나눔’에도 기금을 기부해 운영해오고 있다. 

‘신 영균 탈 북민 장학사업’이다. 탈북 학생 및 제3국에서 출생한 탈 북민 자녀들의 학업과 생활을 후원하고 있다. 

 

나머지 재산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밝혀 영화인 크리스천 사회 각 계 각 층에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잔잔한 두드린다. 그의 건강 비결은 무엇일까? 인터뷰를 마치고 4가지로 요약해보면 첫째가 규칙적인 생활, 두 번째가 꾸준한 운동, 세 번째가 긍정적인 생각과 마지막이 감사하는 마음, 베푸는 삶이라고 강조한다.

 

  © 뉴욕시티얀방송 DB

 ■ 신 영균 회장이 걸어온 길

신 영균 원로 배우는 1928년 황해도 평산의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남은 어머니를 따라 남한에 내려와 서울 동대문구 흥인 초교를 다녔다. 

그 시절,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다니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크리스마스 때마다 하는 성극 무대에 섰다. 

작은 역할이었지만 이는 훗날 ‘대배우 신영균’의 탄생을 알린 서막이 됐다. 

한성고등학교 재학 시절에도 연극부에서 활동했다. 졸업한 뒤에는 ‘청춘극장’에 입단해 2년 동안 신극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너무 쪼들렸다.

 

생계에 대한 고민으로 잠시 꿈을 접고 서울대 치과대학에 입학했고, 해군 군의관 시절 만난 부인 김선희 여사와 결혼한 뒤 치과의사를 했다. 그러나 연기에 대한 열정을 억누를 수 없어 연극 ‘여인천하’ 무대에 올랐다가 당시 조긍하 감독의 눈에 띄어, 1960년 영화 ‘과부’로 영화계에 데뷔했다. 

 

데뷔 2년 만에 ‘연산군’으로 제1회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빨간 마후라’로 제11회 아시아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으며 연기파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미워도 다시 한 번’ 등 한국영화사에 주옥같은 작품 300여 편에서 주연으로 활약하며 톱스타로서 1960년대 한국 영화 전성기를 누렸다.

 

1978년 ‘화조’를 끝으로 배우로서 활동을 중단했다. 배우로 활동하는 동안에도 금호극장, 명보극장을 인수하고, 명보제과를 직접 운영하는 것은 물론, 신스볼링, 한주흥산 등을 설립해 사업가로서도 뛰어난 면모를 보였다. 

 

이후 ▶한국영화배우협회장▶한국영화인협회장▶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장 등을 지냈고, 1996년에는 정치에 입문해 제15·16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1987년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을, 2011년엔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 

2020년 10월 회고록 ‘엔딩 크레딧’을 펴냈다.

 

 

또한 지난해 여러 언론사 보도 중에 신영균 장로의 유언이 공개가 돼 마음에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그는 "내 관에 성경책만 넣어 달라."

그는 평소 고린도전서 15장 10절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 고 고백을 했다.

 

신영균 원로 배우의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영화계의 지나온 길은 한국 영화 전성기로 꼽히던 60년대는 배우 신 영균 에게도 황금기를 안겼다. 60년 영화 ‘과부’로 데뷔하면서 그간 연극으로 다져온 연기 실력을 단박에 인정받았다. 요즘으로 치면 벼락스타로 떠올랐다. 이후 ‘상록수’ ‘연산군’ ‘빨간마후라’ ‘미워도 다시 한 번’ 등 19년 동안 300여 편에 출연했다.

 

또 기회가 온다면 맡고 싶은 역할은? “글쎄요…. 머슴, 왕, 군인, 사장 뭐 안 해본 캐릭터가 거의 없어요. 주로 상남자 스타일이었죠. 심지어 예수, 석가모니도 했다니까요.”

 

“다시 태어나도 배우의 길 가겠다”

신 씨의 기증 재산을 토대로 2011년 신 영균 영화예술재단이 출범했다. 

재단은 건물 임대료와 기부금 등 각종 수익금으로 9년째 영화인 자녀 장학금 지급, 단편영화 제작 지원 등을 하고 있다. 지난 6일에는 ‘제9회 아름다운 예술인상’ 시상식을 성황리에 개최했다. 

연극·영화계 인사들의 공로나 선행을 격려하기 위해 마련한 상인데, 이 분야의 상금(5개 부문 총 1억 원)으로는 최고 액수다.

 

 

“60~70년대에는 내 영화를 맘껏 틀 극장이 너무나 갖고 싶었죠. 하지만 이제 욕심이 없어요. 

그저 마지막으로 내가 가지고 갈 거는 40~50년 손때 묻은 이 성경책 하나예요. 해진아(딸을 보며), 이걸 나랑 같이 묻어 다오.”

 

♠보도국 DB 30년 이상  손때가 묻은 신장로 성격챡 

신 씨는 가죽이 다 해어진 성경책 한 권을 만지며 말했다.(사진)

딸은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을 소리 내 읽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이에요. ‘내가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를 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이런 말씀 때문에 오늘날 신 영군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허! 허! 허! 

 

신씨는 78년 ‘화조’를 끝으로 충무로에서 은퇴했다. 

‘화조’ 등 40여 편에서 그와 호흡을 맞춘 배우 윤정희(75)씨 얘기가 나오자 “참 아까운 사람이에요”라는 말부터 나왔다. 윤씨가 10년째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는 사실이 최근 알려져 안타까움을 사고 있지만 신 장로는 이미 윤 씨의 투병 사실을 알고 있었다.

왕년의 두 스타는 부산국제영화제 등 각종 영화 행사에서 나란히 레드 카펫을 밟으며 돈독함을 과시하기도 했다. 신 장로는 2010년 윤 씨가 주연한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의 VIP 시사회에도 참석했다. 

취재기자가 “윤정희씨는 어떤 여배우인가요?”라는 당시 취재진의 질문에 “멋진 여배우!”라고 대답했다.

 

■ 취재를 마치며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길 원하고 있다. 그러나 행복은 노력하는 자에게 따라오고, 축복은 그가 살아온 그림자로 연결되며, 복은 복의 근원이 되신 하늘에 계신 분이 형통의 복 ,물질의 복, 자녀의 복, 건강의 복을 주셔야 모든 것이 가능한 것으로 취재기자도 이해하고 있다.

 

오늘 지난해 말에 여러 언론사에 이미 보도가 된 감동 스토리 이지만, 본 방송언론사에서 다시 조명하여 재 보도하는 이유는 코로나19로 말미암아 모두가 지쳐 있는 현 시대를 바라보며, 우리 모두 지나간 삶들을 재조명하며 다시 한 번 힘을 내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음이 재생산이 돼 제20대 대통령인 윤석렬 정부가 펼쳐놓은 새로운 시대에 각자 엑스트라가 아닌, 주인공으로 행복하게 살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재 보도한다.

 

취재/보도 박상혁 대기자 ctntv10000@gmail.com   교정/ 전국기자협회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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